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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최고의 유산 -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배상민교수

달빛글라라 2019. 11. 13. 12:0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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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 명사 25인에게 듣는

    남다른 자녀교육법과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최고의 유산


    4대 디자인 어워드 석권한 카이스트 배상민 교수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아라"

    4대 디자인 어워드 석권한 카이스트 배상민 교수 - 최고의 유산

    나눔이 축복이라던 어머니 뜻 이어받아 세상 살리는 디자인을 합니다.

    배상민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가 2015년 레드닷 어워드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 상을 수상한 작품 '박스스쿨'은 이동식 컨테이너 교실이다. 소외된 지역 아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주기 위한 작품이다. 2008년 독일IF, 미국IDEA, 일본 굿 디자인, 시카고 굿 디자인 등을 모두 석권한 '러브팟'은 전기가 필요 없는 친환경 가습기다. 세계 4대 디자인 어워드인 레드닷 어워드, IDEA, IF, 굳 디자인 어워드를 52차례나 수상한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배상민.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디자인을 한다. '소비를 끌어내는 디자인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디자인'을 하는 게 그의 일이다.

    아들 석사 학위식 안 가고 호스피스 봉사 나간 어머니

    그가 최고의 디자인 학교 미국 파슨스 스쿨 교수직을 버리고 2005년 돌연 한국행을 택했을 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코카콜라, 코닥, 3M 같은 글로벌 기업과 작업하며 명성을 날리던 때였다.

    "이상하게 종일 디자인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즐겁게 지내는 데도 집에 돌아오면 공허함이 몰려왔어요. 사람들이 촤고의 디자인이라고 하고 세계적인 상을 받아도 그 공허함이 사라지지 않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맹목적인 성공에서 오는 갈증이었던 것 같아요"

    14년 만에 귀국하던 날 어머니 김진순 씨는 공항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호스피스 봉사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파슨스에서 석사 학위를 받던 날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너 석사 학위 받는 거랑 죽어가는 암 환자 돌보는 거랑 뭐가 더 중요하니?'라고 묻더군요. '암 환자요'라고 대답했더니 '역시 내 아들 맞네'하고는 전화를 끊었어요. 전 그러려니 했죠. 늑막염으로 복수가 차서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만류에도 호스피스 병동에 가신 어머니였으니까요."

    어머니는 25년째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에 호스피스 봉사를 한다. 단 한번도 빼먹은 적이 없다. 목요일은 종일, 일요일은 밤샘 봉사다. 죽어가는 환자를 간병하고, 함께하던 환자가 돌아가시면 염도 손수 한다. 돌아가신 이가 외롭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오랫동안 호스피스 봉사를 해왔지만 드러내기는 싫어하세요. 몇 년 전 딱 한번 호스피스 전문 잡지에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때 기사 말미에 '사랑하는 아들 상민아, 나는 너에게 좋은 집도, 돈 많은 통장도 줄 수는 없지만 호스피스라는 축복을 유산으로 남긴다'라고 쓰셨더군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배교수의 어린시절 , 아버지는 길 가다 노숙자를 보면 집에 데려와 며칠씩 재우곤 했다. "한 번은 노숙자가 할머니가 내 방에 안나가겠다고 해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알 수 없는 손님들이 끝없이 찾아왔다. 한 중년 부인이 너무 울어서 모두 궁금해 했는데 알고 보니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그녀를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가 남몰래 도왔던 것이었다. "그 이야기에 가족들 모두 '역시 우리 아버지'했지요. 나누고 돕는건 우리 가족들에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었어요."

     

    남 시선 개의치 않아, 직접 옷 지어 입는 교수

    1995년 뉴욕 파슨스 재학 시절부터 그는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옷을 직접 제작해 입었고, 그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한복 바지 저고리를 그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의상을 입고 파티에 등장하면 어김없이 그날의 패셔니스타로 꼽혔다.

    "당시에는 망건이라고 하는 작은 두건까지 쓰고 다녔어요. 보는 사람마다 어디서 샀느냐고 묻더군요. 자연스럽게 한복에 대해 설명하고 제 체형의 단점도 가릴 수 있었죠. 내 이름은 기억 못 해도 이 옷을 입은 저는 누구라도 기억하더라고요. 디자이너는 스스로가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남들과 다른 옷을 입었다. 한 살 위 누나의 옷을 물려받아 입어야 했으니 분홍색이나 노란색 블라우스, 레이스와 퍼프가 달린 티셔츠, 빨간 바지 등이 그가 입을 수 있는 옷의 전부였다. 그 시절 파란 옷을 입지 않는 초등학생 남자아이는 그 뿐이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놀림받기 일쑤였다.

    "하루는 어머니께 파란색 남자 옷을 사달라고 했더니 '입지 마. 그거 하나를 소화를 못 하네'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했죠. 그래서 다시 입었어요. 그때부터 아이들이 놀리면 '나니까 이런 옷을 소화하는 거야. 너희는 입어도 안 어울려'라고 받아쳤지요. 그랬더니 아무도 안 놀리더군요."

    그는 스스로를 남의 시선을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찌보면 뻔뻔하고 거칠 것 없는 성격은 아버지를 닮았다.

    해군 출신인 아버지는 전역 후 해운업을 했다. 80년대 초 전 세계를 누비며 사업을 벌였다. 아버지는 긴 곱슬머리에 수염을 휘날리며 선글라스와 트렌치코트를 즐겼다. 80년대에 그런 차림의 남자는 항상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가 제 학년과 반을 모르는 채로 저를 만나러 오신 적이 있어요. 아들을 찾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수위 아저씨에게 확성기랑 자전거를 빌려 운동장을 돌면서 '상민아, 아버지가 왔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어요. 긴 머리를 휘날리며 트렌치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자전거 타는 아저씨를 상상해 보세요. 표현에 적극적이었고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분이셨죠"

     

    전기가 필요없는 가습기 '러브팟'

    부모님은 한 번도 공부하란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하지만 장난이 심해서 하루도 혼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혼나면 잘못했다고 하고 무서워하고 그러면서도 또 사고를 치고 그랬죠".

    고등학교 때까지는 별다른 꿈이 없었다. 그저 뭔가 표현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는 정도였다.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거나, 글을 쓰고, 말하는 일들을 즐겼다. 꿈이 뭐냐 물으면 발레리노라고 답했다. 대학은 영문과를 나왔다. "재수해서 음악이나 발레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덜컥 영문과에 붙어버렸어요. 부모님은 '졸업만 하면 너 하고 싶은 거 해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등록을 했는 데 정말 하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입대를 했죠."

    군대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적어봤다. 그러기 위해선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자니 대학 졸업장이 필요했다. 그 길로 그는 학사고시를 준비했다. 제대를 앞두고 영문학사 졸업장을 받았다. 말년 휴가에 우연히 미국 뉴욕 파슨스 학장이 조선호텔에서 학교 설명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계 1위 디자인 스쿨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갖고 찾아갔더니 그간 제가 배우고 싶었던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모든 걸 가르치는 대학이더군요. 입학 과정을 문의하고 편지와 포트폴리오를 냈는데, 단번에 입학 허가증을 받았어요."

    뉴욕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전 세계의 내노라하는 디자이너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파티도 매일 같이 열렸다. 14년간 한 번도 한국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디자이너로서도 잘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자신이 쓰레기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이 요구하는 이이디어는 '돈이 될 수 있는 것'이죠. 나 역시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해서 소비를 끌어 낼 수 있는 디자인, 환경이나 주변보다는 구매력 있는 소수를 위한 디자인을 하고 있더라고요. 돈을 좇는 '아름다운 쓰레기'를 만들고 있었던 거죠."

    그즈음 오스트리아 출신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란 책을 읽고 욕망에 의한 디자인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디자인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 길로 한국을 택했다.

    "과학대학KAIST에 디자이너가 가겠다고 하니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미래도 불투명했고요.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내 재능을 나눌 수 있는 일, 아름다운 쓰레기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으니까요. "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일하기 시작한 1년 뒤 배 교수는 월드비전으로부터 나눔을 목적으로 하는 제품의 디자인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간의 갈증과 고민이 풀리는 순간이자 그의 첫 번째 나눔프로젝트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세계 최초의 접이식 MP3 플레이어 '크로스큐브', 친환경 가습기 '러브팟', 빛의 밝기와 방향을 조절하는 조명 '딜라이트' 등이 그렇게 탄생했다. 특히 크로스큐브는 2007년 세계적 디자인 어워드인 IDEA에서 은상을 수상해 큰 주목을 받았다. 2006년부터 그는 상품을 개발하고 제품을 판매해 전액 기부하는 나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며 현재까지 매년 240명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2000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 나눔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머니를 따라 몇 번 호스피스 봉사를 가본 적이 있어요. 그러나 그건 제가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습니다. 의사들도 포기한 암환자를 감당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저의 재능으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고 어머니처럼 평생에 걸쳐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고민했습니다. 그게 바로 나눔디자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입니다. 방식만 다를 뿐 어머니가 원하는 '나누는 삶'이라는 방향과는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 디자인 감격이나 창의성은 누구로부터 물려받은건가요? 예술적인 감각은 어머니를 닮았고, 그것을 보는 눈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뭐든 최고를 고집했습니다. 외국 출장길에 사 오는 선물은 언제나 최고급으로 골랐죠. 덕분에 우리 집에는 늘 당대 최고의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저의 안목이 높아질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알뜰하고 생활력이 강한 여성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어머니에게 연애편지를 썼고, 항상 '사랑하는 순아'라고 부르겼어요. 그런 표현력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요.

    - 자유분방한 성격이신가요? 군인 출신인 아버지는 매일 아침 새벽 운동이 끝나면 예배를 드리고 누나와 저에게 하루 계획을 적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는 저녁에 그 일과를 모두 지켰는지 반드시 확인하셨죠. 어릴땐 무척 불만이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저와 누나 모두 너무 외향적인 아이들이라 어느 정도 제제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우리끼리도 '부모님이 그렇게 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얘기를 하곤 하니까요.

    간섭이나 강요는 없었지만 생활 습관과 예의 범절에 대해서만큼은 엄한 분들이셨어요. 저 역시도 결혼해서 저 같은 아이가 태어난다면 부모님처럼 엄하게 키울 생각입니다. 부모님의 엄한 교육이 없었다면 뉴욕의 화려한 생활에서 방탕하게 살았을지도 모르죠. 부모님의 교육 덕분에 자유를 누리면서도 방종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유혹 앞에서도 절제가 되더라고요. 항상 감사히 여기는 부분입니다.

    -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세요? 뉴욕 파슨스에 가면서부터 나만의 노트를 썼습니다. 어떤 것을 볼 때, 느낄 때, 문제에 부닥칠 때 최소 5분씩 깊이 생각합니다. 생각할 때는 반드시 노트에 적거나 그림을 그립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생각도 꼭 해봅니다. 나라면 이 공간을 어떻게 꾸몄을까, 나라면 저걸 어떻게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요.

    디자이너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만약에 나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하죠. 사람들이 보기엔 그때그때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저에게는 20여 년에 걸친 고민이 그 순간에 터져 나오는 거에요. 벌써 20권이 넘는 노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페이지를 펼쳐도 그때 어떤 고민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인간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모든 고민이 그 안에 있습니다.

    - 왜 나눔이 최고의 유산인가요?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모님 모두 나눔을 실천하셨습니다. 단 한번도 누구를 도와라, 어떤 삶을 살아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라면서 당연히 '나는 사회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해 온 일들을 자식으로서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처럼 호스피스를 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니 저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생명을 살리는 나눔 프로젝트를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시대 명사 25일에게 듣는

    남다른 자녀교육법과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최고의 유산"

    지은이 : 중앙일보 강남통신팀

    펴낸곳 : 토트, (주)북새통

    초판 : 2016년7월21일

    최고의유산

    #최고의유산 #명사 #자녀교육법 #육아 #배상민 #kaist #산업디자인

    (2019-11-13.WED, SilverC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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